03

유난히 축축하고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갑니다. 


처서(스물네 절기의 하나. 입추와 백로의 사이에 있는 절기)가 지나자마자 스미는 찬 기운에 언제 그렇게 더웠나 싶기도 합니다. 


가을. 9월

달력을 넘기면서 올해도 3개월뿐이 남지 않은 것을 실감합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저는 겨울 전 잠깐 스치는 가을을 무서워하면서도 기다립니다. 

좋으니 더 짧게 느껴지는, 오기 전부터 빠르게 지날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가을이 유일하기 때문인데

벌써 아쉬운 마음을 좋은 음악과 글로 달래며 9월을 씩씩하게 열었습니다. 



 <서론이라는 어떤 한계선을 경계로 해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다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 밀폐된 내면에서의 자기 수련이 아니라 사회와 현실 속에서 

옛날에 내가 가졌던 인식애와 순수와 정열을 던져 넣고 싶다. 


 - 목마른 계절, 전혜린> 




 알록달록 붉고 노랗게 물드는 풍경을 상상하며 초가을 안부를 남깁니다. 

 순수와 정열 속에 충만한 가을 보내시기를

02

모두 잘 지내고 계실까요? 

22년도 절반이 훌쩍 지났습니다.


매달 월세 마냥 빠져나가는 사이트 이용료를 보며, 이 텍스트 카테고리만큼은 나만의 방으로 만들겠다던 다짐과는 달리 업데이트를 오랫동안 미루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힘든 시기에 새겼던 타투를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미용적 측면보다는 어떤 기운을 보태줬으면 싶어 새겼던 문양이었습니다. 

올해는 힘들었던 만큼 무엇에도 기대하고, 기대지 않을 단단함이 새로이 생긴 것 같아요.

금낭화를 닮은 어깨 위 문양이 다 지워질 쯤엔 다른 상처도 말끔히 지워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늘 멋지다 생각하는 친구가 책을 썼어요.

 단숨에 읽기 아까워 천천히 아껴 읽었는데, 그 중 좋았던 구절을 남깁니다.


 <나는 생각했다. 저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작은 기적임에 틀림없다고. 하지만 불가능도, 작은 기적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쓰러져도 자꾸 일어나서 계속하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잠깐 휘청이는 법은 알아도 꺾이는 법은 좀체 모르는 나무를 닮은,

그런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내 품에 다 들어올 정도의 둘레를 가진 그 나무를 마음으로 안고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튼튼해졌어?” 


 - 출발선 뒤의 초조함, 127p >



01


종종 가게를 왜 그만두었냐는 말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엄마도 모르고 아빠도 모르는 일급비밀이에요. 

사실, 어떤 말로도 제 마음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가수님의 책에 내가 왜 가게를 그만두었는지 명쾌하게 쓰여있네요?



 ​"맞아요. 장사가 늘 잘 안되지요. 그게 힘든 일이에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힘든 건 다른 데에서 와요. 

 실은 책방을 열면서 돈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좀 마음대로 확신해보자면 많은 동네 책방의 대표님들, 

 그리고 작은 책방을 열고 싶어 하는 분들도 저처럼 그랬을 것 같아요. 마음속 최우선의 자리에는 돈보다도 꿈이나 소원, 어떤 가치관 같은 것들이 

있었을 거예요. 이 일로 떼돈을 벌 수 없다는 것쯤이야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장사를 할수록 제가 이상해지더라고요. 

 분명히 호젓하고 여유로운 책방이 되기를 바랐으면서, 정말로 손님이 너무 드문드문 오니까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지고요. 

 혹시 책이 너무 안 팔리는 건 내 큐레이팅에 문제가 있어서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내가 들여오고 싶은 책보다도 잘 팔리는 책에 기웃거리게 되고요. 손님이 들어와서 책을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책방에 와서 이 책 저 책을 한참 구경해놓고서 10퍼센트 할인해 주는 온라인 서점을 통해 책을 주문하는 것을 보거나, 사진만 한참 찍고 그냥 나가는 손님을 보면 속에서 부글부글하는 것이 느껴져요. 

 돈에 연연하지 않고 살기 위해 마련한 공간 안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돈에 연연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너무 웃기죠."



​ 스물 한 살부터 나의 가게를 갖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오로지 열정 하나로 배우고 부딪혔는데 

 그렇게 바라던 작은 가게를 하면서 저는 점점 이상해집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만 봐도 나보다 행복한 것 같아서, 나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나보다 덜 힘든 것 같아서 눈물이 났어요. 맛있는 저녁을 기분 좋게 먹어놓고는 작업실부터 집까지 울면서 걸어간 적도 있어요. 


 손님들이 그러셨어요. 이렇게 예쁜 것만 보고 일하면 행복할 것 같다고 

 그런데 막상 매일 보는 저는 마음이 지옥이었어요. 

 마음이 지옥이다 보니 손님이 와도 고맙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행인같이 느꼈습니다. 

아. 나 같은 사람에게 식물을 살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이구나 이런 한심한 생각도 종종 했습니다.​



 며칠 전 느지막이 일어나 카톡을 확인하는데 클라이언트였던 해인 사장님께 메세지가 와있었어요. 

 대뜸 주소를 물어보셨는데 그게 싫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택배가 도착했는데 뜯어보니 문단의 제작 상품, 마음에 들어했던 브랜드의 클립과 문구 

 그리고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어요. 



 "설 사장님이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섬세히 마음 써주신 모습도 이유이겠지만 무언가

 '기분 좋은 에너지' 를 식물처럼 뿜어내는 사람이라고 느껴서인 것 같아요. " 



 편지를 읽는데 머리가 띵, 사랑에 빠진 것 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다시 일하고 싶고 나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지 깨달았어요. 

 컴퓨터를 켜서 메모장에 나름 정성스럽게 답장을 썼습니다. 정말 감사하다고요. ​ 



사실 한창 작업이 많을 때 저는 죽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었습니다. 

곁에서 지키고 있는 애인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 잠수를 탈 만큼 

책임감 없는 사람을 제일 혐오하면서 다 잊어버린 채 숨고 싶은 충동에 매몰되던 하루하루였는데. 

 식물에는 손이 가더라고요. 내가 힘들다고 보살피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고 시들어버리니까요. 

 문단에 작업 간 날 끝내고 바다를 보러 갔는데 짙은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10분 정도 멍하니 바다를 보다가 차에 타 눈을 뜨니 서울이었어요.​



 그렇게 들른 게 마음에 걸려 얼마 못 가 다시 문단을 찾았습니다. 

 자리를 비운 해인 사장님의 사랑스러운 어머님이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해인이가 식물을 자기 새끼처럼 돌본다며, 어디 갈 때도 꼭 식물을 대신 챙겨달라 당부한다고.​




 해인 사장님 같은 인연이 있는데 매일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멀리서부터 찾아와주던 손님들이 계셨는데 왜 망할까 봐 무서웠는지 

 들르고 살펴봐주는 친구들이 있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반짝거리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 그 시간은 저를 키운 물이고 흙이고 거름이에요. 


 다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날 꼭 눈을 바라보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그때까지 모두 평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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